2025 가을학기 제 10강 한국 근대 서양화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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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SDA 댓글 0건 조회 292회 작성일 25-11-20 10:14본문
제10강은 미술사학자 조은정 교수를 모시고〈한국 근대 서양화의 전개〉를 주제로 진행되었습니다.
한국 근대 서양화의 길을 연 사람들
<수용과 실험, 그리고 인간적 열정의 기록>
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서양화의 등장은 단순한 양식 변화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새로운 시각 체계와 표현 언어를 받아들이는 일이었고, 동시에 익숙한 감각과 뿌리 깊은 미감을 다시 돌아보는 과정이기도 했다. 근대기 한국의 화가들이 일본 유학을 통해 처음 서양화를 접했을 때, 그들에게 서양화는 ‘재현’에 머무르지 않고 감상과 암시, 내면의 움직임까지 담아내는 회화였다. 그러나 이는 당대의 조선 화가에게도 크게 이질적이지만은 않았다. 자연을 바라보며 그 속의 뜻을 형상화해온 동양 회화의 깊은 전통이 이미 그들에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5년 고희동의〈자화상〉은 이러한 흐름의 상징적 출발점이었다. 새로운 물감과 화면, 전혀 다른 시각 언어 앞에서 그는 자신을 낯설게 바라보는 법을 배웠다. 외래 양식이지만 ‘내가 나를 바라보는 방식’은 여전히 조선 화가의 시선 위에서 형성되었던 것이다.
전람회와 근대적 미술환경의 등장
서화협회 전람회를 찾았던 한 기자는, 고희동이 오색의 채색으로 꽃봉오리를 피워내는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다. “지란지실에 들어간 듯한 향기로운 감상” 이 짧은 문장 속에는 근대기 조선 화단을 뒤흔들었던 생동감이 담겨 있다. 화가들은 나라 안팎에서 쏟아지는 새로운 시각의 물결 속에서 서로의 기량을 시험하고, 전람회라는 근대적 제도를 통해 대중과 만났다. 회화가 더 이상 일부 계층의 전유물이 아닌 ‘감상 가능한 문화’로 확장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1929년 김종태의〈노랑저고리〉는 당시 화단의 흐름 속에서 ‘조선적인 것’을 찾으려는 열망을 잘 보여준다. 노란 저고리와 붉은 깃의 강렬한 대비는 단순한 색의 선택이 아니라, 그 시대 사람들이 품었던 정서와 향토성을 시각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시도였다. 김용준이 이 작품을 두고 “조선 고유의 맛을 드러내려는 의도”라 평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해방 이후의 공간에서 서양화가 다시 쓰는 의미
광복 직후, 미술계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며 또 한 번의 전환기에 서 있었다. 1945년 덕수궁에서 열린 〈연합군 환영 겸 해방기념 미술전〉은 단순한 전시가 아닌 역사적 선언이었다. 수많은 작가가 참여하고 미군 장병까지 전시장에 드나들었던 이 전시는 해방된 조선이 누구와 함께 새로운 문화 지형을 만들어갈 것인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이후 각종 해방기념전과 미군정 주도의〈조선종합미술전〉(1947) 등이 이어졌다. 그러나 문화적 재편의 움직임은 언제나 순수하지만은 않았다. 미군정의 반공 정책은 미술계에도 그림자를 드리웠고, 작품이 아닌 예술가 개인과 단체가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예술이 예술 외적 힘에 흔들릴 수밖에 없었던 격동의 시대—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들은 각자의 붓으로 시대의 혼란과 생존을 기록했다.
신사실파 <새로운 ‘사실’을 꿈꾸다>
1947년 서울 원서동의 작은 사무소에서 김환기, 유영국, 이규상이 결성한 '신사실파'는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짧지만 강렬한 흔적을 남겼다. 그들은 기존의 재현적 사실을 넘어선 ‘새로운 사실’을 추구했다. 전통과 현대,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한국적 조형 감각을 새롭게 발명하려 한 움직임이었다. 제1회 화신화랑 전시(1948), 제2회 동화화랑(1949), 그리고 전쟁 이후 부산에서 열린 제3회전(1953)까지—전쟁과 혼란 속에서도 그룹 활동이 이어질 수 있었던 이유를 이경성은 이렇게 말한다. “이들의 예술은 오늘의 현대 미술을 꽃피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고 오광수는 그 지속성을 ‘조형 이념보다 인간적 관계에서 비롯한 연대감’으로 설명했다. 신사실파는 거대 담론의 충돌보다 ‘함께 만들어가는 예술’이라는 인간적 신뢰가 빚어낸 공동체였다.
정영목은 그들의 순수함과 열정이 없었다면 한국 현대미술은 훨씬 메마르고 외세 의존적이었을 것이라 평했다.
마무리<예술가로 산다는 것에 대하여>
1985년, 박완서는 한 예술가의 삶을 이렇게 회고했다.
“전쟁 이후의 암담한 시기에 미치지도, 환장하지도 않고, 술 취하지도 않고, 화필을 놓지 않았던 한 예술가의 삶… 그것이야말로 지극히 예술가답지 않은 예술가의 모습이었다.”
이 문장은 한국 근대 미술의 역사를 통과해온 모든 화가들의 초상을 닮아 있다. 혼란과 공백, 전쟁과 통제의 시대를 지나면서도 그들은 붓을 놓지 않았다. 예술이란 무엇인지, ‘조선적인 것’은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 새로운 형식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끝없이 고민했다. 그리고 그 고민의 층위들이 쌓여 오늘의 한국 미술이 서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한국 서양화의 여정은 외래 양식의 수용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 앞에서 스스로를 다시 발견해온 과정이었다. 그 길 위에서 화가들은 역사와 사회의 무게 속에서도 끝내 화면을 향했고, 그들의 선택이 오늘 우리의 미술을 가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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